단군의 나라가 중국 침략에 무너졌다고?
[칼럼]한 무제가 무너뜨린 것은 단군조선 아닌 기자조선
장경순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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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15 15:21 | 최종 수정시간 11.04.15 15:22
‘단군 왕검이 BC 2333년에 세운 고조선이 BC 108년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사마천 사기의 조선열전과 다른 자료들을 찾아 봤다.
읽어 보니 무슨 기자가 나오고, 위만... 준왕이 어쩌고저쩌고... 중국 사람들까지 나타나서 얽히고설켜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그럼 고주몽 이야기에 나오는 해모수는 언제 적 사람인가.
중국 역사에서 수 십 개 나라가 물고 물리던 춘추시대 얘기도 알고 보면 이치는 간단하고 이해가 안갈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내 나라의 이야기가 이렇게 이해가 안 가다니.
최근에 와서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됐다. 잘못된 전제를 고집하면서 주어진 사실들을 받아들이니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억지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잘못된 전제란 바로 고조선을 한민족의 통일국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전제하에서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한(漢) 나라의 조선 정벌을 연결하려고 했다. 무슨 나라 하나가 한 무제의 공격을 받고 망했는데, 그때 우리 민족의 나라는 고조선뿐이었다고 하니 망한 나라는 바로 고조선이었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한민족의 통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나라 중의 하나였다고 판단을 하고 나니 이 때 기록들을 앞뒤 관계의 어긋남이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한 무제가 무너뜨린 건 고조선이 아닌 전혀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
BC 108년, 무슨 일이 있었나
혹자는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 중국을 미화하고 타민족을 폄하했다고 비판한다. 아주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이런 의견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엄청난 역사책의 곳곳에서 그의 철저한 사관의식(오늘날의 언론의식과 통한다)을 수 천 년 세월을 넘어 건네받았기 때문이 첫 번째 이유고, 그가 기록한 사실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사기의 기록이다. 원봉12년(BC 108년) 한 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 조선을 공격했다. 후에 누선장군이 한나라 조정에 체포되자 순체가 두 군대를 합쳐 조선왕 우거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고 조선의 대신이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원정이 끝난 후 무제는 공을 다퉜다는 죄목으로 순체를 죽여서 거리에 내다버리는 기시의 형에 처했다. 체포됐던 양복 또한 사형에 해당했지만 돈으로 죄를 용서받고 평민이 됐다.
망한 조선의 왕 우거는 위만의 손자다. 위만은 본래 한(漢)의 개국공신인 노관의 수하 장수로 중국 사람으로 판단된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해 흉노로 망명하자 위만은 노관을 따르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넘어왔었다.
이 때, 위만을 받아준 조선의 임금이 준왕이다. 위만은 후에 자신을 받아준 준왕을 쫓아내고 조선의 왕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 대에 이르러 한 무제에 의해 멸망한 것이다.
준왕은 누구의 자손인가
위만을 받아 준 조선의 왕이 준왕이었다면 그는 단군왕검의 자손인가. 위만이 망명한 조선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인가.
두 질문의 답이 모두 ‘아니오’임을 시사하는 것이 준왕에 대한 다른 표기다. 그를 ‘기준(箕準)’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군왕검의 자손이 아닌 중국인 기자의 자손 준왕이라는 얘기다.
이 시대 한민족의 조선과 중국인들의 조선은 다른 지역, 다른 국가를 의미한다. 한민족에게 조선은 ‘쥬신’의 음역으로 주로 단군왕검의 조선 이래 동북아시아에 있었던 한민족의 국가들이다.
이와 달리 중국인들에게 조선은 중국의 은나라가 멸망할 때 동쪽으로 망명해 온 기자의 나라를 뜻한다.
사마천은 주나라 무왕이 은을 멸망한 후 전왕조의 왕족인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봉했다’는 것은 체면상의 표현일 뿐이고 현실은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에 담겨 있다. 조선 땅에 대해 주나라 왕이 제후를 봉하고 말고 할 형편이 아니었고, 기자는 나라가 망한 후 망명을 떠난 것이다. 무왕의 입장에서도 망국의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높은 기자가 부담스런 존재였으니 그의 망명을 묵인한 것이다.
은나라의 지체 높은 존재였던 기자가 동쪽으로 많은 문물을 전수하며 왔으니 그 곳의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의 주위로 사람이 모이니 당연히 기자의 나라는 곧 한민족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일정한 위상을 확보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단군왕검의 나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패권질서에 순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조선의 나라들과 달리 기자의 나라는 지배층이 중국의 망명세력인 관계로 이래저래 중국과의 접촉이 많았을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바라본 조선은 한반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바로 이 기자의 나라였을 뿐 그 너머 동쪽이나 북쪽의 다른 나라들까지 따질 만한 필요성은 거의 없던 시절이다.
중국의 정세가 소란해지면 동쪽으로 중국인들이 망명을 가는 건 기자의 조선이었다. 이렇게 접촉이 많아지면서 중국의 나라들과 무력분쟁을 벌이는 일도 잦아졌다. 한 무제의 조선정벌, 다시 말해 기자조선 정벌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다.
한 무제가 무너뜨리고 사군을 설치한 조선은 단군왕검의 조선이 아니라 기자가 세웠다가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기자조선인 것이다.
그럼 고조선은 누가 무너뜨렸나
식민사관의 책략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의 상고사를 모조리 신화의 틀에만 묶어 놓는 것이다. 임금을 뜻하는 단군이라는 단어를 특정인의 이름이라고 해서 1908세를 살았다고 한다든지 BC2333년에 개국한 나라가 수 천 년이나 지속돼 BC108년에 망했다고 하는 따위다.
그러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일 또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크게 다를 수가 없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부양능력을 가진 이 터전에서 그 당시 기술체계로 단일 통일 국가가 기나긴 통치체계를 갖추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알타이 계통을 타고 몽고를 거쳐 동쪽으로 이동을 계속한 민족은 중간에 여러 나라를 세웠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제대로 패권을 행사한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민족의 역사와 개천의 신화가 비롯됐다. 전례 없이 막강한 나라였기는 하지만 한민족의 통일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발언권이 민족의 다른 국가들을 제압할 만했기 때문에 그 지위는 마치 중국의 주나라와 같은 종주국에 해당할 만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공자의 말씀을 빌어 고조선의 쇠퇴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관중이 피발 좌임을 징계하였다.”
제나라 환공의 신하 관중이 연나라를 구원해 동쪽 이민족의 침입에서 구원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피발 좌임이란 머리를 땋고 옷을 왼쪽으로 여민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다.
일찍이 관중의 패도를 좋게 여기지 않은 공자였지만, 관중에 대해 한 가지 좋게 평가한 것이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발 좌임을 했을 것”이란 말이다. 관중이 연나라를 구하지 않았다면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태어났을 거란 뜻이니 한 때 고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관중이 이끈 열국의 연합군에게 패한 후 고조선의 세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종주국의 힘이 빠지면 불안정한 패권의 진공상태가 된다. 한민족의 역사는 여기서 단군왕검의 대를 이을 새 영웅을 기다리는 단계로 들어섰다.
단군왕검, 해모수, 그리고 주몽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대해서는 너무나 허황된 얘기들이 많다. 민족적 자부심을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이후의 일들과 전혀 앞뒤 관계를 맞출 수 없다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이런 저런 책에 있는 얘기들을 많이 접해 봤지만, 전혀 다른 버전의 신화라는 느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눈길이 가는 한 구절을 접하게 됐다.
‘기원전 239년 패기만만한 청년 장군 해모수는 23세의 나이로 단군 조선의 서울 백악산을 점령했다.’
쇠퇴해가는 고조선, 그 후 해모수와의 혈연을 앞세우며 나라를 세운 고주몽, 이들 사이에 이처럼 어울리는 연결고리는 달리 보지 못했다.
북부여, 또는 황룡국의 개국 임금인 해모수가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해모수는 아직 실증역사의 영역으로 넘어 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최소한 고구려의 건국 과정에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할 길이 없다.
고주몽은 200년 전의 인물일지도 모르는 해모수의 아들임을 자처했다. 민중들의 마음을 모으려면 해모수 없이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다수 대중에게 해모수의 이상을 계승한 나라임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그의 아들임을 내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학 분야에서 좀 더 많은 진척을 통해 단군성조와 해모수, 고주몽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계보가 실증되기를 기대한다. 신화에 파묻힌 상고사를 역사의 영역으로 드러내는 일이 절실한데 난데없이 한 무제의 고조선 정벌 시나리오가 끼어들어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다. 만필서생이 부족한 식견을 모아 이렇게 얘기를 꺼내게 된 이유다.
(원본 기사 링크:
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1462)